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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1450∼1504)

남계서원(南溪書院)
1552(명종7)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며 후진을 야성할 목적으로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창건되었다.
1566년(명종21) 강사상의 계청(啓請)으로 '남계(濫溪)'라는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에 이은 조선조 두번째의 사액 서원이 되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함께 배향 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 전사청, 명성당, 양정재, 보인재, 애련헌, 영매헌, 풍영루, 묘정비각 등이 있다.
소장된 서적은 어정오경백편, 고려사 등 59종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남계서원 묘정비
이 비석의 비문은 사연이 많은 비석이다. 그 사연의 내막은 이러하다.
봉사손(奉祀孫) 정덕제(鄭德濟)가 묘정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본암(本菴) 김종후(金鍾厚)가 지었다.
이 비문을 두고 마을의 대성(大姓)과 사족(士族)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전해온다.
이는 비문 내용에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열거하면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적)의 호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본암(本菴)의 과실이라 하였다하며,
이어서 그렇게 쓰도록 종용한 봉사손 덕제의 허물을 따지고 들었다.
봉사손 덕제가 부득이 본암에게 개찬(改撰)을 청하자, 본암은 드디어 차례로 기록된 제현(諸賢)들의 이름을 삭제해 버리고
다만  "예닐곱 분이 나왔다" 고 써서 그대로 비석에 비문을 새겼다.
그러나 여론은 오히려 "예닐곱 분이 나왔다" 고 한 "예닐곱" 중에는 또 회재를 넣지 않으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기고
비판의 소리가 더욱 거세지면서 인근에 거주하던 노선국(盧宣國)이 도끼로 비문을 찍어 본암의 이름을 깎아 내 버리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봉사손 정씨(鄭氏)는 지방 감영에 고소하였고 이어 노선국(盧宣國)은 함양 옥에 갇혔으며,
두세 명의 감사가 바뀌도록 모두 이 사건의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고 전해오는 사연 많은 비석이다.


남계서원강당:명성당
 

자(字)는 백욱(伯勗), 호(號)는 일두(一蠹),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함길도 병마우후(咸吉道兵馬虞侯) 육을(六乙)의 아들. 함양(咸陽) 출신.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 되고, 한동안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 오경(五經)과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1483년(성종 1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고, 1490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다.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안은 현감(安陰縣監)을 지내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종성(鍾城)에 유배, 죽은 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되었다.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 묘소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승안산 기슭에 모셔져 있다.
선생의 묘소는 1504년 죽음 직후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라는 처참한 역사적 현실을 겪었던 곳이다.
육신이 채 썩기도 전에 묘가 파헤쳐져 목이 잘리는 모진 수모를 당해야 했다.
묘역 내에는 일두 정여창의 묘와 그 뒤에 정경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 신도비
묘소 앞에 선 귀부이수 형태의 신도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했던 동계(桐溪) 정온(鄭蘊 ; 1569-1641)이 지은 것이다.
정온은 이웃 고을 출신으로 정여창을 사숙한 사람이다.

 
 

당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경사 (經史)에 통달하고 역행실천(力行實踐)을 위한 독서를 주로 했다.「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진수잡저(進修雜箸)」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모두 소각(燒却), 지금의 정 구(鄭 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속에 그 유집(遺集)이 전할 뿐이다.

중종(中宗) 때 우의정에 추증(追贈), 광해군(光海君) 때에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나주(羅州)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陜川)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居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