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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문순공(文純公) 이 황(李 滉, 1501∼1570)


퇴계 이황 선생 영정
 

초명은 서홍(瑞鴻), 자(字)는 경호(景浩), 초자(字)는 계호(季浩), 호(號)는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號)는 문순(文純), 진사 식(埴)의 아들. 예안(禮安) 출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정자(副正字)·박사(博士)·전적(典籍)·호조 좌랑(戶曹佐郞) 등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542년 충청도 암행어사(忠淸道暗行御史)가 되고, 이어 문학(文學)·장령(掌令) 등을 지낸 뒤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그후 사복시정(司僕寺正)·응교(應敎)를 거쳐 단양(丹陽)과 풍기(豊基)의 군수(郡守)를 지내고 1554년 형조(刑曹)와 병조(兵曹)의 참의(參議)에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으며, 그후 부제학(副提學)·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1566년(명종 21)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어 예조 판서(禮曹判書), 1568년(선조 1)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다음해 고향에 은퇴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 제170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세운 서원.
1574년(선조 7) 지방유림의 발의로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도산'(陶山)의 사액을 받았다.
영남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경내에는 5,000여권에 이르는 장서와 도산십이곡 등의 판목 3,200여점, 유물 16점을 보관하고 있다.


도산서원 전경
이 서원의 건축은 모두 무사석계층(武砂石階層)이며 방주(方柱)의 사용이나 초공(草工)을 끼운
대들보의 간략한 가구(架構) 등 전체적으로 간소하다.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숭양서원(崧陽書院) 등과 더불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集大成)한 대유학자로 이 이(李 珥)와 함께 유학계(儒學界)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하여 후진 양성과 학문의 연구에 전심, 끝까지 학자적 태도에만 철저했다. 시문(詩文)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고 겸허(謙虛)한 성격의 대학자로서 중종(中宗)·명종(明宗)·선조(宣祖)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 및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槐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 전국의 수십개 서원(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퇴계 이황 선생 묘소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퇴계 문중과 유림은 퇴계가 임종을 앞둔 1570년 "내가 죽으면 반드시 조정에서 예장(현대의 국장)을 내릴 것인데 이를 사양하라.
비석을 세우지 말고 작은 돌의 앞면에 미리 지어둔 명(銘)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만 새기라"고 한 유언 때문에
퇴계가 마지막까지 화려한 예우를 거부하고 겸양과 검소함을 추구한 뜻을 받들어 묘소가 초라하더라도 선뜻 단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보물제1894호. 퇴계선생문집은 1600년에 발행된 초간본으로 46권 24책이다.
퇴계 이황의 학문적 성과를 집성한 목판과 서책으로 내용이 풍부하고 양이 방대하며 문집 편집 방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