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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 1510∼1560)


필암서원(筆巖書院)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서원.
이 서원은 1590년(선조23)에 선생의 고향 장성읍 기산에 처음 세워졌는데, 정유재란 떄 소실되었다.
그 뒤 1624년(인조2)에 장성군 황룡면 증산리에 다시 세웠으며, 유림의 소청으로 1662년(현종3) '筆巖書院'이란 사액을 받았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786년 선생의 문인이자 사위인 양자징을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훼철령 때에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사적 제24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자는 후지(厚之),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는 문정(文正).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 황(李 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해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낙덕정(樂德亭)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에 있는 개항기 때의 누정.
낙덕정(樂德亭)이 위치한 곳은 조선 인종(仁宗) 때 학자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은거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김인후는 당시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과 윤임(尹任) 사이의 정권 다툼을 염려하다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순창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전북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 낙덕암(樂德巖) 주위의 산세를 즐기며 강학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72호로 지정.

 


그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여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여,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기 때문에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것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하여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으며,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 묘소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 원당산에 모셔져 있다.
그 아래에는 하서 선생의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