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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문열공(文烈公) 조 헌(趙 憲, 1544∼1592)


중봉 조 헌 선생 영정
 


자(字)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諡號)는 문열(文烈), 응지(應祉)의 아들,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정주 교수(定州敎授)를 거쳐 1572년(선조 5) 교서관 정자(校書관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다 삭직(削職), 곧 저작(著作)에 등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호조와 예조의 좌랑(佐郞), 감찰(監察)을 역임하고, 통진 현감(通津縣監)이 되어 죄인을 엄중히 다스려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기용,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지내고, 1582년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학제 개편(學制改編)으로 전국에 제독관(提督官)을 둘 때 공주(公州) 제독관에 임명되어, 당시 정권을 잡은 동인(東人)이 이 이·성 혼 등을 추죄(追罪)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고 고향에 돌아간 사실로 인해 직장(職場)을 이탈했다는 죄로 파직당했다.

1589년 동인의 전횡(專橫)을 공격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길주(吉州)에 유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용서받았다. 1591년 일본 사신이 오자 옥천(沃川)에서 상경, 대궐 앞에서 일본 사신의 처단을 상고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 국방력의 강화를 주장했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 7백여명 을 규합, 이해 8월 영규(靈圭) 등 승병(僧兵)과 합세하여 청주(淸州) 를 수복했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까와(小早川陸景)의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戰功)을 시기하는 관군(官軍)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당하고 불과 7백명의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 참가, 끝까지 용전하다 7백 의병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이 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사람으로「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지지하여 이 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중봉 조헌 선생 묘소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산63-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하였으나 인조 14년(1636)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묘소는 마을 뒷산 중턱의 무성한 노송 사이에 위치해 있다.
묘역은 약 100평으로 상석·문인석·망주석이 있으며, 봉분 앞 좌·우에 각각 묘비가 있다.
호석이나 곡장은 없으며 앞부분 평지는 비교적 좁은 편이다.
 


우저서원 외부


우저서원(牛渚書院)
경기도 김포시 감정동 492번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2년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宣祖) 때의 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48년(인조 26)에 창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