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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문경공(文敬公) 김 집(金 集, 1574∼1656)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신,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할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고 아버지는 참판 김장생(金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昌寧) 조씨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字)는 사강(士剛)이며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다. 

선조24년(1591)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사장학(詞章學)보다는 경전연구와 수양에 전념하였다. 광해군2년(1610)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사퇴하였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후 등용되어 부여현감과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냈고 그 뒤 전라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직하였다. 

이후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윤선거(尹宣擧) 등과는 상례(喪禮)에 대해 논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장생이 편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전심전력 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사임하였다. 이에 성균관의 유생들이 벼슬에 오래 머물도록 해달라는 소를 올리는 등 사람들에게 그의 덕망은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효종 즉위년(1649)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金尙憲)의 특청을 효종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효종4년(1653) 좌참찬을 거쳐 이듬 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경전연구와 수양에 힘썼다.


효중대 산당 영수 북벌의 밀지오신(密旨五臣) 신독재 김집 유고 (대전광역시 역사박물관)
 


이이(李珥)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그리고 아버지 김장생(金長生)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그 학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이 있고, 편저로는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황해도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도덕이 있고 글을 널리 읽는 것이 문(文)이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경계하는 것이 경(敬)이다.

고종20년(1883)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와 효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신독재 김 집 묘비

신독재 김 집 선생 묘소
충남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35-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7년 12월 3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봉분의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서 있고,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김집 선생 묘소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김집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한 승려가 자신이 있는 고운사의 자리는 찾기 힘든 명당으로
그 자리에 김집의 유해를 모시라는 계시를 받고 왔다고 하며,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이니 산소를 정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벌곡면 양산리 옛 고운사 절터 자리를 김집의 묘소로 정하였다고 한다.

 



부산서원(浮山書院)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규암면 진변리  
부산서원(浮山書院)은 조선인조와 효종대에 활약한 김집(金集)과 이경여(李敬輿)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숙종45년(1719) 이지역 유림들이 공론을 모아 처음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후 청(淸)에 대한 북벌의식을 기억하고
나라을 걱정하는 우국적 성격을 띤다. 
부산서원은 19세기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서원철폐로 없어졌다 1970년 다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