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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1606∼1672)


회덕 동춘당(懷德 同春堂)
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춘당로 78
보물 제209호. 이 건물은 효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송준길(宋浚吉)이 자신의 호 동춘당(同春堂)을 따서 건축한 별당이다.
이 별당의 서북측에는 송준길의 고택인 사랑채와 안채·사당 등이 독립된 건물로 건축되어 있다.



경내에는 여타의 조경 없이 담장 주변으로 고송을 비롯한 몇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는 간결한 구성을 하고 있다.
건물 앞에 걸려 있는 현판은 송준길 사후 우암 송시열이 직접 써서 걸어둔 것인데 동춘당이란 '살아 움직이는 보과 같아라'라는 뜻이 담겨 있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송세영(宋世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송응서(宋應瑞)이고, 아버지는 영천군수(榮川郡守) 송이창(宋爾昌)이다.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사헌부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직에 나갔다가 장인 정경세(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진선(進善)·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이 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송준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집의·이조참의 겸 찬선 등으로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년(효종 9) 대사헌·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쳤다.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났는데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주 01)를 주장할 때 송시열을 지지하였다.

이에 남인(南人)의 윤휴(尹鑴)·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설과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일단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겸 좨주·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단지, 1665년(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퇴하였다.

1673년 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1675년(숙종 1) 허적(許積)·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김장생과 함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이 건의된 이래, 여러 차례 상소가 있은 다음 1756년(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어록해(語錄解)』·『동춘당집(同春堂集)』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이 있다.

 

 

동춘당 송준길 묘소
대전시 서구 원정동 산60-2번지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송준길의 묘는 충남 연기군에 있었으나
후에 충남 공주 등 여러 곳으로 옮겨졌다가 숙종 26년(1700) 이곳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의 묘비는 이곳으로 이장 한 후에 세워진 것으로,
외손자인 판서 민진후가 글을 짓고 증손자인 현령 송요좌가 글씨를 쓴 것이다.
묘표의 대좌 윗면은 연꽃으로, 앞면은 당초문,
그리고 뒷면은 험상궂은 귀신의 얼굴을 조각하였다.
당시의 묘석물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동춘당문집(同春堂文集)
동춘당 송준길의 문집이며 영조44년(1768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으로
숙종13년(1687년)에 초간본이 간행되었고 중간본은 증손 송요좌가 초간본을 교정,
보완해서 만든 교정본을 현손인 늑천 송명흠이 상주 흥암서원(興巖書院)에서 간행하였다.
[출처] 대전시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