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 산수도 >, 『첨재화보(添齋畵譜)』
제7폭 1748년, 종이에 담채, 18.7×22.2cm, 개인 소장.
강세황은 36세에 자신의 호를 딴 작품집인 『첨재화보』를 만들었다.
『첨재화보』는 일생 문인화가의 길을 간 그의 입지를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의미가 크다.
표암의 미술사적 공헌은 역시 미술비평에 있다. 그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1686-1761) 같은 앞 시대의 대가들과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같은 동시대 화가들의 무수한 작품에 화평을 가했다. 이런 적극적인 미술평론은 실로 전례 없던 일이었다. 표암이 남긴 화평은 실제 작품들에, 그리고 그의 문집 《표암유고(豹菴遺稿)》에 상세히 남아 있다.
〈백석담도〉, 《송도기행첩》, 1757년, 종이에 수묵담채, 32.8×53.4㎝,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은 강세황이 지금의 개성지방인 송도를 여행하고 그린 《송도기행첩》 중의 한 점이다. 당시에는 새로운 방법이었던
원근법, 음영법 등의 서양화법을 사용하여 그렸다.
그의 화평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이다. 한 예로 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 1710-1784)의 〈인왕산도(仁王山圖)〉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진경산수를 그리는 사람은 혹시 지도처럼 될까 봐 걱정하는데 이 그림은 충분히 실경의 모습을 담았으면서도 화법을 잃지 않았다.”
표암은 인품이 너그러워서 남을 비판하는 것보다 그의 장점을 드러내주는 화평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표암 평”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 있는 작품은 당연히 그 예술적 가치가 몇 갑절 더 높아졌기 때문에 표암의 집 앞에는 화평을 받아가려는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표암(豹菴) 강세황 묘소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510-10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