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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씨]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655~?)


홍유후 빙월당 설총(薛聰) 영정
 

 
자(字)는 총지(聰智), 호(號)는 빙월당(氷月堂), 본관은 경주(慶州).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 어머니는 요석궁 공주(瑤石宮公主).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벼슬은 한림(翰林)을 지내고 주로 왕의 정치에 자문 역할을 했다. 

유학(儒學)과 문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일찌기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들은 가르쳐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가 창제한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은 당시 중국 한문의 섭취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이두(吏讀)를 창제했다고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진평왕(眞平王 : 579 ∼ 631) 때의 「서동요(薯童謠)」, 선덕여왕(善德女王 : 632 ∼ 647) 때의 「풍요(風謠)」 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왕계(花王戒)」로써 신문왕을 충고한 일화가 전한다.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서악서원(西岳書院)
경북 경주시 서악동 국도 옆에 있다. 
1561년(명종 16)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유신(金庾信)의 위패를 모시며 창건하였고,
1563년(명종 18) 신라의 문장가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제향일은 매년 음력 2월 중정(中丁)과 10월 초정(初丁)이다.

 


한림학사 홍유후 설총선생 묘소
경주 읍지인 동경지에 선생의 묘소는 경주 보문동 월토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1952년 보문동의 이중구라는 선비가 찾아서 받들고 묘비를 세웠다.
경주 보문동에 있다.

 






삼성현역사문화관(三聖賢歷史文化館)
소재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상대로 883-30(인흥리 257-13)  
설립일 : 2015년 4월 30일  
규모 : 건물 총면적 4,981㎡, 부지면적 262,774㎡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동절기인 11월~2월은 오후 5시까지)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은 경산이 배출한 삼성현(원효,설총,일연)의 업적과 사상을 공유하고,
경산사람의 자긍심을 담은 역사,문화,교육이 어우러진 문화관광 공간인 동시에 공원으로서 쾌적한 휴양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삼성현역사문화관은 삼성현에 대한 콘텐츠 개발을 통한 방문객들의 체험과 학습이 가능한 전시공간으로
우리나라의 대표 선각자 3인을 테마로한 전시관이다. "삼성현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설총하면 유명한 이야기 '화왕계(花王戒)' 가 있습니다

그 내용입니다. 한번 통일신라시대의 왕권강화에 앞장섰던 신문왕에게 설총이 어떠한 충고를

했는지 살펴 봅시다!

나라가 태평해지자 신문왕은 후궁들을 거느리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나 학문에 두루 밝아 국학에서 유생을 가르치던 설총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왕이 성총을 불러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 무슨 재밌는 이야기나 들려달라고 했다.

왕의 말을 들은 설총은 드디어 임금에게 충고를 해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화왕계 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꽃 중의 왕인 화왕이라 불리는 모란꽃에게 장미꽃이 찾아와 아양을 떨었습니다.

' 이 몸은 언제나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봄비에 몸을 곱게 씻고, 산들바람처럼 지내는 장미라 하옵니다.
화왕님의 아름다운 모습과 높으신 덕을 사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으니,
바라옵건데 부디 제가 임금님을 곁에서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화왕이 크게 웃으며 허락하자,

이번에는 별로 아름답지 않은 할미꽃이 화왕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습니다.

'이 몸은 궁궐 부근의 길가에 살고있는 할미꽃이라 하옵니다.
지금 임금님 주변에는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꽃들이 많습니다.
화왕께서 옳은 정치를 하시려면 독을 제거해줄 약초도 필요한 법이옵니다.'

그러나 화려한 꽃들에 둘러싸인 화왕은 할미꽃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할미꽃은 

'지금까지 왕에 오른 분들 중에는 간사한고 아첨하는 무리를 가까이 하고, 정직한 자들을 멀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옛 성인들 중에는 실력은 있지만 뜻을 펴지 못한채 일생을 마친 분들이 많아습니다.'

그제서야 화왕은 할미꽃의 말을 받아들이고 간사한 무리들을 물러가게 했으며 재능있는 인재를 뽑아 나라를 발전 시켰다고 합니다.

설총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신문왕은 그 이야기가 자신을 빗대어 말한 것임을 깨닫고,
 그 후부터는 사치를 하거나 후궁들과 노는 일은 절대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