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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857 ∼ ?)

최치원(崔致遠) 영정


 
자(字)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候). 본관은 경주(慶州). 신라(新羅)의 서울 사량부(沙梁部 : 삼국유사에는 본피부라고하며 황룡사 남쪽 미탄사 부근에 있다고 기록함)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정밀·민첩하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서기 874년(경문왕 14) 한 번 시험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율수현위(宣州율水縣慰)의 벼슬에 올랐다.

고운 최치원 선생 동상
부산 해운대구 우동 동백섬이라고 불리는 곳 정상에 고운 최치원 선생의 동상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역사를 보면 고운 최치원 선생은 가야산으로 입산 길에 오르는 길에 운대산을 지나가게 됐는데,이 주변의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대를 쌓고 바다와 구름, 산과 달을 음미하면서 풍류를 즐기셨다고 합니다.
 선생의 자이기도 한 해운을 동백섬 남쪽 바위에 <해운대>라는 세 글자를 음각하면서 지명의 유래가 됐다고 합니다.


 
877년(헌강왕 3) 치적(治績 : 정치적으로 남긴 공적)으로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承務郞侍御使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 : 금으로 장식되어 허리에 차던 장신구)를 하사(下賜)받았다.
879년(헌강왕 5) 당(唐)나라 반적의 우두머리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高변 : 당나라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抄)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헌강왕 11) 돌아와서 시독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지서서감(知瑞書監)의 벼슬을 받고
당(唐)나라에서 지었던「계원필경(桂苑筆耕)」과「중산복궤집(中山覆궤集)」 및 시부(詩賦) 3권을 헌강왕(憲康王)에게 올렸다.

무성서원(武城書院)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서원. 
이 건물은 신라 말의 유현인 고운 최치원과 조선 중종 때 태인 현감 신잠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사액됨으로써 무성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이때 조정(朝廷)의 기강이 어지러움으로, 문란한 국정을 개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自請)하여
태산(전북 태인)·부성(충남 서산) 등 태수(太守)를 지냈다.
894년(진성여왕 8) 나라가 혼란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므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 시정의 수습책)을
상소하여 아찬(阿​飡 : 신라 17관등 중 여섯째 관직)의 벼슬을 받았다.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당나라에 가서 익힌 학문과 도학은 때를 만나지 못해 마음껏 펴 보지 못함을 개탄하며 벼슬을 사양하고,
산과 강(江)과 해변에 누각과 정자(亭子)를 짓고 송죽(松竹)을 벗삼아 학문에 심취하며 풍월(風月)을 읊조리며 유랑하다가,
896년(진성여왕 10) 가족(家族)을 거느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동복(冬服) 형 현준(賢俊) 및 정현(定玄) 스님과 도(道)로 우정을 나누다가 여생을 마쳤다.

1020년(고려 현종 11) 8월 내사령(內史令)에 증직,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