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공 율곡 이 이(李 珥) 영정
아명은 현룡(見龍), 자(字)는 숙헌(叔獻), 본관은 덕수, 호(號)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찰방(察訪) 원수(元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강릉(江陵) 출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 초시(進士初試)에 합격,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서(佛書)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儒學)에 전심하여 23세 때 이 황(李 滉)을 찾아가 만났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生員試)·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초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副敎理)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병으로 사퇴했다.
그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 율곡(栗谷)과 석담(石潭)에서 학문연구에 전심하다가 1581년 다시 불려 대사헌·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자운서원(紫雲書院)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에 있는 서원이다.
1615년(광해군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이(李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50년 (효종 1)에 ‘자운(紫雲)’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埋安)하고 서원터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뒤 1969년에 지방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고 1975년과 1976년에 걸쳐 보수하였다.
경기도 시도기념물 제45호로 지정
이듬해 이조·형조의 판서(判書), 우참찬(右參贊)을 역임, 1583년 당쟁(黨爭)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같은 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등용,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조선 유학계에 이 황(李 滉)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설보다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함을 학문을 연구하는 태도로 했으며, 이 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說)을 근본사상으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 이 사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학문을 민생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성(養成) 및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조자앙(趙子昻)의 체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