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이미지

[성씨] 문간공(文簡公) 성 혼(成 渾, 1535∼1598)


우계 성혼 선생 영정
 
 
자(字)는 호원(浩原), 호(號)는 우계(牛溪)·묵암(默庵),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수침(守琛)의 아들.
17세 때 감시(監試)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복시(覆試)를 못치르자 과거(科擧)를 단념, 백인걸(白仁傑) 문하에서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했다. 선조(宣祖) 초에 학행으로 참봉(參奉)·현감(縣監)·지평(持平) 등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580년에는 장령(掌令) 직을 굳이 거절하고 마교(馬轎)를 타고 상경하라는 우례(優禮)까지 받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右參贊)에 오르고 1594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러 영의정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일찍부터 이 이(李 珥)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 황(李 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지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주장하는 이 이와 1572년(선조5) 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이 이의 학설을 반박, 유학계(儒學界)의 큰 화제가 되었다.


 

파산서원(坡山書院)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학자 성수침(成守琛)과 그의 아들 성혼(成渾), 아우 성수종(成守琮) 및 백인걸(白仁傑)의 위패를 봉안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1568년(선조 1)에 이이(李珥),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었고 1650년(효종 1)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에 복구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1966년 사당만 복원하였다.
 

이 때문에 이 이의 문인인 조 헌(趙 憲)·한 교(韓 嶠)·황 신(黃 愼)·이 귀(李 貴)·정 엽(鄭 曄) 등이 그의 문인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죽은 뒤 반대파들에 의해 한때 관작(官爵)을 추탈당했다가 인조 초에 복관(復官),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海州)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咸興)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우계 성혼선생묘(成渾先生墓)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산8-2번지
묘역은 사성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을 중심으로 우측에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봉분정면에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상석앞에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쌓았으며 좌우에 문인석을 배치하였다.
묘소의 입구 우측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김집(金集)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1981년 7월 16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