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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1548∼1631)


문원공 사계 김장생 영정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號)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공이다.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고,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처음에는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의 거두가 되었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 돈령부참봉 등을 지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이후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정여립의 옥사 사건 등으로 은퇴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노력하였다. 그 뒤 전란이 종결되자 단양군수, 남양부사(南陽府使), 양근군수(楊根郡守), 안성군수, 익산군수, 철원부사 등의 지방관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인조 때는 호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낸 뒤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 산림파(산당) 영수로 공신 세력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송익필과 이이, 성혼의 제자이자 계승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특히 김장생, 김집 부자는 나란히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장생은 예학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이다 그의 예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이후 혼란해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즉, 정통에 중범을 두었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로부터 사서와 근사록 등을 배웠고, 성장하여서는 20세 무렵에 이율곡에게 사사하였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1581년 종계변무의 일로 명나라 사행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자감청정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후 유성룡의 추천으로 종친부 전부가 되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년)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이 역모를 꽤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무혐의로 풀려 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사계 김장생 선생 묘소 일원 안내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선생 묘소
충남기념물 제47호로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7-4에 위치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4번 국도를 타고 논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1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1번 국도를 갈아타고 계속 논산 쪽으로 가면 도로가에 "사계 선생 유적지 입구"라는 푯말이 나온다.
그 아래쪽으로 난 농로 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면 고정리가 나오고,
마을 끝 고정산 자락의 광산김씨 선영에 사계 선생묘가 자리하고 있다.

 



사계 김장생 선생의 예학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당쟁으로 동서와 남북이 분당, 대립하는 시절이었고, 한편으로는 ‘이괄의 난’과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가체계가 위기에 빠져 토지제도 등 여러 방면에서 누적된 폐단을 개혁하여 민생을 회복하여야 할 시기였다.

이를 위하여 여러 노력이 진행되었는데, 특히 사상계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정통주의가 훨씬 강력하게 대두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예(禮)의 실천의 방법으로 그는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였고, 이를 위하여 계구신독(戒懼愼獨)을 중요시 하였다. 
즉, 일상생활에서 항상 계구신독을 염두에 두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그 마음이 발함에 모두 예에 맞게 행하여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예 실천의 주체인 인간 내면의 심(심)을 개발하고 천리(天利)의 법칙을 깨닫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의 강조는 가례를 통한 유교적인 가족질서 확립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는 근사록(近思錄)을 깊이 연구하고 고금선유(古今先儒)의 여러 가지 학설을 참조하여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토속과 인정에 맞추어 가례(家禮)를 고치고 보급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예와 효의 관계를 “예가 아닌 것은 효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 ”라고 설명하면서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여겼다. 
또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중시하여 ‘관혼상제’는 가정에서 일용의 체(體)이며, 길흉의 수(수)에 통한다. 

하나라도 폐(廢)하여 강습하지 않은 바 없다“고 하여 어느 때라도 시행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학의 결론은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에 있었다. 
가정, 사회, 국가에서 그 나름의 기강과 질서가 서여 하는 것이며, 그 근간이 되는 것이 통(統)이며, 통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예(禮)이다.
이러한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은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기능하였다. 
사계 김장생은 조선 예학의 태두(泰斗)이며, 기호학파의 적통이었다. 부모가 죽은 뒤 3년 시묘 살이가 김장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돈암서원(遯巖書院)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논산 돈암서원(遯巖書院, 사적 제383호)은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34년 사계의 제자를 비롯한 지역 사림이 건립했다.
이 서원은 조선 현종이 즉위한 해(1660년)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며 사액서원이 됐으며,
고종 8년(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경내의 양성당, 정의재, 거경재, 원정비


돈암서원 응도당 내부
보물 제1569호로 지정돼 있다.
1880년(고종 17년)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옮기지 못하고 옛터에 남아있던 건물을 1971년 이건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누마루식 건물이다.

 


 
돈암서원은 논산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조 문신이었던 사계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633년(인조 11년)에 건립되었다. 
그 후 1660년 현종이 돈암서원으로 이름 지어 현판을 내려준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기호학파는 조선중기 기호 지방을 근거지로 한 이율곡, 성혼 학파를 통칭하는 말이다. 
당색으로 볼 때 기호학파는 서인의 주축을 형성했지만, 서경덕처럼 기호지방을 근거지로 하면서도 북인으로 나간 인물이 있음을 고려할 때, 기호학파가 곧 서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호학파를 성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이율곡, 성혼, 송익필을 들 수 있으며, 인조반정이후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학파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율곡의 제자인 김장생을 거쳐 송시열에 이르러서 기호학파는 정계,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숙종대에 이르면 기호학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회덕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은 노론이 되고, 이산을 중심으로 한 윤증 계열은 소론으로 분립되었다. 
기호학파는 사단칠정론 등의 성리설과 예학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특히 송익필, 김장생, 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예학은 남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을 일으키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