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원공 사계 김장생 영정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號)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공이다.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고,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처음에는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의 거두가 되었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 돈령부참봉 등을 지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이후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정여립의 옥사 사건 등으로 은퇴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노력하였다. 그 뒤 전란이 종결되자 단양군수, 남양부사(南陽府使), 양근군수(楊根郡守), 안성군수, 익산군수, 철원부사 등의 지방관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인조 때는 호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낸 뒤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 산림파(산당) 영수로 공신 세력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송익필과 이이, 성혼의 제자이자 계승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특히 김장생, 김집 부자는 나란히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장생은 예학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다.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이다 그의 예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이후 혼란해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즉, 정통에 중범을 두었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로부터 사서와 근사록 등을 배웠고, 성장하여서는 20세 무렵에 이율곡에게 사사하였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1581년 종계변무의 일로 명나라 사행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 참봉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자감청정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후 유성룡의 추천으로 종친부 전부가 되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년)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등이 역모를 꽤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무혐의로 풀려 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사계 김장생 선생 묘소 일원 안내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선생 묘소충남기념물 제47호로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7-4에 위치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4번 국도를 타고 논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1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1번 국도를 갈아타고 계속 논산 쪽으로 가면 도로가에 "사계 선생 유적지 입구"라는 푯말이 나온다.
그 아래쪽으로 난 농로 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면 고정리가 나오고,
마을 끝 고정산 자락의 광산김씨 선영에 사계 선생묘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