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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1631∼1695)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선생 영정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 · 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 시호는 문순(文純). 홍문관교리 박의(朴漪)의 아들이고, 형조판서 박동량(朴東亮)의 손자이다. 모친은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고,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이 사위이다.

어릴 적부터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서 학문을 출발했으며 평생 이이를 존경하였다. 인조27년(1649)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 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자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이, 성혼의 문묘(文廟)배향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에 대해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 내용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상소하였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 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으므로 이에 분개하여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하고 성균관을 자퇴하였다. 

1651년 김상헌, 김집에게서 학문을 배우면서 송시열, 송준길과도 교류하였다. 그들은 당대의 유종(儒宗) 으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다.

효종11년(1659) 봄에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어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해 효종이 사망하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놓고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기년복설(1년)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남인의 주장인 1년이 채택되면서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당하고 양근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6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저술과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으나 유배지가 지평(砥平), 원주, 금곡(金谷) 등지로 여러번 변경되면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유배생활 중 그는 소학, 근사록, 대학, 중용 등 사서육경의 본문 구절 중 어려운 부분을 쉽게 풀이해서 해설한 <독서기(讀書記)>를 저술하였다. 이어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 주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 추가한 춘추보편(春秋補編) 을 출간하였고,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心學至訣)> 등의 책을 집필하였다. 

숙종6년(1680)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복관, 등용되어 사헌부집의(執義),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당초에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론·소론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나아가 소론계 학자들과 학적 교류와 활동을 하였다. 

숙종10년(1684) 윤선거의 묘갈명 때문에 벌어진 회니논쟁(懷尼論爭)에서 그는 송시열과 윤증의 화해를 주선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해 서인 내부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허영과 허새의 옥사가 무고, 날조로 밝혀지자 그는 사건을 무고, 확대시킨 김익훈, 김석주의 처벌을 주장했다. 1683년 김익훈, 김석주의 처벌문제를 놓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윤증, 나양좌, 최석정(崔錫鼎), 박세당, 남구만 등과 소론의 지도자가 되었다. 

숙종20년(1694) 갑술환국 때는 노론의 김춘택 등에 협력하여 남인 축출을 하였고 서인이 집권하고 소론이 주도권을 잡게 되자 좌의정에 발탁되었다. 그가 교유한 인물과 초기의 문인들은 대부분 소론이었고, 송시열 등 일부 노론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노론의 입장을 지지한 것을 두고 그가 죽은 뒤 그의 문하생 대부분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이탈하는 원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숙종20년(1694) 그는 남구만, 윤지완 등과 함께 이이, 성혼에 대한 성균관 문묘종사 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김육이 주창한 대동법의 재실시를 적극 주장하여 전국 확산에 기여하였다. 

일부 소론으로부터 노론의 주장에 지나치게 영합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탕평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선조대에 이이가 주장한 조제보합설(調劑保合說)을 모범으로 한 것으로서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로 구체화되었으며,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가 송시열과 사돈간 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 소론계 인사들도 있었다. 

저서로는 <남계집>이 있다. 성리학 이론에 해박하여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 유학자들의 학통을 서술,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집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유학자들의 계보를 신라시대까지로 소급, 파악하였다. 예학 지식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 <삼례의(三禮儀)>, <육례의집(六禮疑輯)>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문인(門人)들 중 상복을 입고 3년상과 시묘살이를 한 이들이 2백여명이나 되었다. 윤증이나 박세당과는 달리 송시열과 크게 충돌하지 않았으므로 사후에도 별 탈이 없었다.

영조40년(1764) 집권 노론의 반대와 여러 논란 끝에 영조에 의해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묘는 시흥시 군자동 군자산 아래에 있다.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김집과 함께 조선시대 문묘와 종묘에 종사된 6현 중 하나이다. 경종2년(1720) 5월 숙종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박세채 시호 교지
도덕이 있고 글을 널리 읽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마음이 바르고 온화하며 순수한 것을 순(純)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