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유(裕),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 본관은 순흥(順興),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판도판서(版圖判書) 부(孚)의 아들, 1260년(원종 1) 문과(文科)에 급제,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 문중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했고, 판도 좌랑(版圖佐郞)·전중시어사(殿中寺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충렬왕 14) 우사의(右司議)가 되고 좌승지(左承旨)·정동행성 원외랑(征東行省員外郞)을 거쳐 고려 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종, 원나라에 들어가「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쓰고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했다.
재북 문성공 회헌 안향 선생 묘소판문점 근처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에 있다.
위쪽에 있는 묘소가 회원 안향선생 과 배위(配位)의 무덤이며,
아래쪽은 아들인 문혜공(文惠公)과 그 배위의 무덤이다.
1294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서 동남도 병마사(東南道兵馬使)가 되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했고, 이어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 좌사(三司左使)·첨의 참리(僉議參里) 세자이보(世子貳保)를 역임했다.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하자 동경유수(東京留守)·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계림부윤(鷄林府尹)·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고, 이해 태상왕(太上王)이 된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1543년(중종 38)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소수서원내 강학당
이어 충렬왕이 복위한 이듬해 수국사(水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었다.
한편 문교(文敎)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했으며,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삭성하여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와, 육경(六經)·제자(諸子)· 사(史) 등의 서적을 구입했다.
이로써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지칭된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경기도 장단(長湍)의 임강성원(臨江書院), 전남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경북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안향 문하의 六君子
성리학의 본향인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를 송조육현(宋朝六賢)이라고 부른다. 이는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 주희(주자)를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문성공 안향의 문하에 이름난 여섯 학자를 육군자라고 해 추앙해 마지않았다. 육군자는 국재 권보, 역동 우탁, 동암 이전, 매운당 이조년, 이재 백이정, 덕재 신천 등을 일컫는다.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이 국재 권보의 사위며 백이정의 문인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안향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안향이 세상을 떠날 때 백이정, 권보 등 문인들에게 “나는 학문이 그대들보다 못하였다. 그대들은 연상이나 동년이라고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내가 세상을 떠나면 우탁을 나와 같이 스승으로 모시고 섬기라”고 당부했다. 이에 당시 백이정의 문인이던 익재 이제현과 치암 박충좌 등 24인과 권보의 문인이던 가정 이곡, 담암 백문보, 졸옹 최해 등 19인이 모두 역동 우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해 학문적 계보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