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영정
초명(初名)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字)는 달가(達可), 호(號)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迎日),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운관(云瓘)의 아들. 영천(永川) 출신.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한 뒤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修撰) 등을 거쳐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한 후 이해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족(女眞族)의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 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 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 등을 역임하고, 1371년 태상 소경(太常少卿)·보문각 응교(寶文閣應敎) 겸 성균직강(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 나와 사신으로 큐우슈우(九州)의 지방장관 이마가와(今川子俊)에게 가서 왜구(倭寇)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379년 전공 판서(典工判書)·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 예의 판서(禮儀判書)·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전하고, 이어 밀직제학·보문각 제학·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 성근익찬공신(誠謹翊贊功臣)에 봉해지고, 1383년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용인 충렬서원(忠烈書院)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서원.
1576년(선조 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에 ‘충렬(忠烈)’이라 사액되었으며, 그 뒤 정보(鄭保)와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8년 삼사 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지서연사(知書筵事), 이듬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고,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문하시중(門下侍中)·판도병의사사(判都兵議司事)·병조상서시사(兵曹尙書侍事)·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 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 가서 조 준(趙 浚)·남 은(南 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 : 태종)이 이성계를 그날 밤으로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방원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擊殺)되었다.
선죽교(善竹橋)
황해도 개성시 자남산 동쪽 기슭에 있는 돌다리로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추살되어 순사(殉死)한 곳이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鄕校)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시문(詩文)에 능하며 시조「단심가(丹心歌)」이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중종(中宗)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개성(開城)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 묘소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순절 당시 죄인으로 몰려 차례도 치르지 못한채 풍덕땅에 묻혔으나,
10년 뒤 신원되고 다시 5년 뒤 천장(遷葬)이 허락되어 이곳에 모셔졌다.
개성 선죽교에서 피살된 정몽주, 묘소는 왜 모현에 있을까?
포은 정몽주 선생은 망해가는 고려왕조를 위해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충절의 표상입니다.
그가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에게 피살된 선죽교는 황해도 개성시 선죽동 노계천에 있는 작은 돌다리인데요. 원래 ‘선지교’라고 불렸으나 포은 선생이 죽은 자리에서 왕대(대나무)가 돋아났다고 전해지면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현재 북한 땅인 개성에서 숨을 거둔 포은 선생이 지금의 용인시 모현면에 묘소가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경상북도 영천 출신인데다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유는 ‘모현면’이란 지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모현이란 동네의 원래 이름은 쇄포였는데, 포은 선생 돌아가신 후 14년만인 1406년 벌어진 한 사건으로 인해 지명이 바뀌게 됩니다.
당시 개성시 풍덕군 자리에 있던 포은 선생 묘소를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옮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장하는 도중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상여의 영정이 어디론가 날아가게 되는데...
영정이 떨어진 자리가 바로 모현면 능원리의 문수산이었다는 겁니다.
후손들은 이를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이곳에 묘를 안장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사연이 있다는 게 흥미로운데 이 일이 있고 5년 뒤인 1411년 모현이란 이름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쇄포란 지명을 버리고 “충신을 사모한다”는 뜻의 ‘모현(慕賢)’으로 새로이 불리게 됐다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모현면의 지명은 포은 정몽주 선생과 역사를 함께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Tip!!매년 경기도 용인에서는 포은 문화제 행사가 열리는데요....■ 포은문화제란? 포은문화제는 용인시의 지원을 받아 용인문화원이 주최하는 행사로 고려시대 충신이며 동방이학의 시조로 조선 성리학의 기반을 마련한 포은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매년 개최되는 행사로 지난 2013년에는 대한민국축제콘텐츠 대상을 받은 전통문화축제랍니다.
포은문화제의 기원은 태종 6년(1406년) 포은 선생의 묘를 개성 풍덕에서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장하던 중 지금의 용인 풍덕천동에 이르렀을 때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영정이 날아 지금의 능원리 묘역에 떨어진 것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이곳에 묘를 모신데 기원하고 있습니다.